겨울동안은 암자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날씨영향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암자를 제대로 알기에는 겨울이 제격이 아닌가 싶다. 암자를 다니다 보면 여러가지 잇점이 있는 것 같다. 번잡하지 않아 내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라는 점, 대개의 암자가 산중에 있어 적당한 등산과 산책이 필요해 건강에도 좋다는 점, 암자로 가는 길은 정감어린 오솔길이라는 점, 게다가 암자의 위치까지 좋아 전망이 탁 트인다면 금상첨화라는 점 등이다. 오늘의 여행지는 하동 쌍계사 뒤의 국사암과 불일폭포이다. 오늘 여행은 조금 색다르다. 지리산의 암자와 원시림, 정감어린 오솔길, 폭포와 함께하는 가을 막바지의 단풍여행이다. 국사암을 지나면 지리산 깊은 원시림을 만나게 된다. 계곡을 몇 번 건너서면 깊은 산 중의 예쁜 휴게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벼랑 끝에 서 있는 불일암을 보게 되고, 천 길 낭떠러지를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가면 남한 제2의 폭포를 맞딱드리게 된다.
쌍계사 부도밭 - 중창불사로 번잡하기 이를데 없는 쌍계사에서 그나마 절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은 여기가 제일이다. 부도밭과 담장, 단풍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같다.
쌍계사 전경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이 만나 합쳐진 곳이라 쌍계(雙溪)라 하였다. 각종 중창불사로 번잡하기 짝이 없다. 팔영루 앞마당의 9층 석탑도 그러하거니와 석등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 절 전체가 비좁은 느낌을 주어 답답하기 그지 없다. 공간배치의 엄밀함의 부족이 여실히 드러난다.
쌍계사는 이전에 많이 와 본 곳이라 폭포 답사 후 시간이 나면 둘러 보기로 하였다. 이 번잡한 곳을 빨리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에 가을 단풍의 끝에 있는 쌍계사를 흘깃 보며 국사암 가는 길을 잡았다. 금당영역 옆의 비탈길을 들어서면 국사암과 불일폭포 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다소 가파르기 때문에 초행길을 나서는 사람은 긴장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오르막길은 채 십분도 지나지 않아 끝나 버린다. 비탈길이 끝나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국사암까지 100미터의 정감어린 오솔길과 불일폭포까지의 한 시간 남짓 원시림 산행길로 나누어진다.
금당영역-금당과 팔상전,청학루가 있다. 높은 층계 위에 조성되어 위엄을 갖춤과 동시에 조형적 아름다움도 엿보인다.
국사암 가는 100미터 정도되는 이 오솔길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 중의 하나이다. 쌍계사의 부속암자로는 국사암,불일암,칠불암이 있다.
국사암과 사천왕수
국사암 입구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 나무가 되었다는 사천왕수가 있다. 주목할만한 문화유적은 없어도 이 천년 넘은 느릅나무로 인해 암자의 오랜 내력을 알 수 있다. (국사암 관련 글은 이후에 별도로 올릴 예정입니다.)
국사암에서 잠시 목을 축인 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갈림길에서 오른쪽길을 택하여 불일폭포 방향으로 향했다. 불일폭포 가기 전 진감선사 부도가 있는 고대(高臺)를 찾아 나섰다. 갈림길에서 100미터쯤 가서 급격히 꺽어지는 산등성이 왼쪽으로 좁은 오솔길이 보였다. 이 길은 나뭇꾼의 길처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길이다. 사실 나도 이 곳을 찾지 못하여 헤메다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마을 주민을 만나 길을 알게 되었다. 오솔길 입구까지 안내해준 마을 주민께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전하고 싶다.
고대(高臺)와 부도(보물 제380호)
쌍계사 경내의 진감선사 부도비와 짝을 이룬다. 노송이 우거져 있는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후련하여 한번쯤 가볼만하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불일폭포 산행이다. 스님 한 분이 앞서 간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국사암과 불일폭포 가는 길에선 스님들을 많이 뵐 수가 있다. 그만큼 수양하기에 좋은 산행길이 아닌가 싶다. 이 스님은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불일폭포 가는 길은 유달리 계곡을 많이 건너게 된다. 이전에 물이 많은 여름에는 신발을 벗고 건넜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옷 젖을 염려는 없다. 세번째 개울을 건너면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노닐었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다. 그저 평범한 바위인데,전설이 있고 의미가 부여되니 조금은 신령스러워 보인다. 이 환학대를 지나니 붉은 단풍숲이 눈을 아찔하게 한다. 가을 끝에 마지막 붉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주일만 빨리 왔어도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일주일 전에는 천자암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네 가을은 이렇게 앞다투어 가야 하는 아쉬움이 늘 존재한다. 느긋함을 가지고 계절별로 곳곳을 돌아보는 수 외에는 도리가 없다.
불일폭포 가는 길은 많은 탐방객으로 길이 뚜렷하다. 이 뚜렷한 길에 돌포장이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래도 고마운게 무지막지한 시멘트 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포까지 제법 긴 길을 돌로 까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연 흙길이면 더 좋겠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자연과 더불 수가 있으니 다행이다.
좁은 골짜기 사이의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어느 덧 널찍한 터가 나타나고 장승 네 기가 길손을 맞이한다. 특이한 점은 장승 네 기 중 두 기는 꼬마장승이다. 그 생김새도 귀엽지만 이름도 '아이 동(童)'자를 써서 동장군이라 명하였다. 누구의 발상인지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중에 부부장승만 있으면 외로울 터 자식 둘이 있이니 얼마나 오붓하겠는가!
장승을 지나 왼쪽에는 초가 지붕의 산중 휴게소가 있다. 이 넓은 터가 이전에는 청학동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운다" 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백리,(중략)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하였다. 조선조 김일손과 남명 조식은 이 곳 불일폭포 주위를 청학동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계곡이 높고 가파르며 터가 너무 좁아 용납할 곳은 아니다'라며 청학도의 난점을 살짝 제기하기도 하였다. 지리산에는 이 곳 외에도 악양 북쪽, 현재의 청학동, 세석고원,선유동 등 청학동으로 불린 곳이 많다. 이들 모두가 지리산에서 살기 좋고 비교적 너른 땅이 있는 곳이다.
불일폭포휴게소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휴게소 앞으로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이 있고 옆으로는 돌탑을 쌓아 무리를 이룬 '소망탑'이 있다.
이 산중 휴게소는 1993년 지리산 자연보호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변규화씨가 거주하고 있었다. '털보할아버지'라 불리우던 이 분은 애석하게도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리산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으니 아마 지리산신선이 되었으리라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 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소망탑
휴게소 벽면에 걸여 있는 고 변규화씨의 시를 한 번 보자.
속(俗)을 초월한 소박함이 느껴진다.
내 삶의 의미
변규화
나는
세상을 위해서는
도무지
아무런 재주도 재능도 없고
게으르다
그러면서
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내일이 오늘이
된다는 것과
오늘 이 순간 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고마움
그것이
큰 행복감으로 남아
깊은 산
한자락에
초막을 엮어
삶을
즐기며 살아 간다.
휴게소를 벗어나서 다시 산행을 시작하였다. 우리를 앞서가던 스님은 벌써 불일폭포를 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스님이 말을 건넨다. '구도가 잘 잡히세요?" "스님 덕분에 구도가 아주 좋습니다"하니 껄껄 웃으신다.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산길을 올랐다.
휴게소에서 불일암까지는 낭떠러지와 가파른 길이 연이어진다. 나무난간을 설치하기 전에는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특히 겨울철에 눈이 오고 얼음이 얼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엉금엉금 기어서 가야하는 힘든 길이었다.
불일암
불일암은 보조국사의 시호를 딴 이름이다. 혹은 불교에서 부처님을 가리키는 '불일(佛日)'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신라의 원효.의상이 도를 닦고 고려 보조국사가 머문 암자이다. 1980년대 초 화재로 소실된 후 최근에 다시 지어졌다. 폭포소리를 늘 들을 수 있는 남한 유일의 암자가 아닌가 싶다.
불일암에 들어서면 쭉쭉 뻗은 소나무가 멀리 지리능선을 호위하고 있다. 암자 앞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와 원시림이 우거져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지척에서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암자 앞 불일폭포 안내문에서 폭포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이전에는 바위암벽을 타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는데, 지금은 나무 계단이 놓여져 있어 가슴 졸일 일은 없다. 폭포 앞에 이르니 폭포를 한 눈에 볼 수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옛날에는 이 전망대가 없어 폭포를 한 눈에 보기가 어려웠다. 고개를 뒤로 완전히 제치고 나서야 하늘과 맞닿은 불일폭포의 위용을 볼 수 있었다. 자연 앞에 존경을 표하는 의식이 없어진 것은 안타까우나, 폭포를 잘 바라볼 수 있도록 적절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불일폭포
우리나라에서 설악산 대승폭포 다음으로 큰 높이 58미터의 거폭이다.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서 쏟아진 물이 중간의 학연(鶴淵)에서 잠시 머물다 흘러내리는 전형적인 2단 폭포이다. 겨울을 앞두고 있고 수량이 적어 원래의 웅장항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남는다.
불일폭포 주위는 육산(肉山)인 지리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깍아지른 절벽 지형이다. 절벽의 끝으로는 푸르디 푸른 노송이 그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소나무에 푸른학과 흰학이 놀러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폭포구경을 마치고 서둘러 하산을 하였다. 쌍계사에 잠시 들러 참배를 하고 나니 벌써 어둠이 내려 앉았다. 매표소를 지나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석문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일행들이 일단 식사를 먼저 하자고 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조금은 한적한 곳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식당 주인 부부가 낙엽을 쓸고 있었는데, 세상에 그렇게도 찾았던 석문이 있는게 아닌가? 쌍계사를 수 번이나 와본 내가 왜 이리도 찾지를 못했던가! 그 이유는 주인장 말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쌍계사에서 대형버스 출입을 위해 주차장을 새로 만들고 난 후 이 돌문 사이의 폭이 좁아 버스가 다닐 수 없게 되자 새로 길을 내었다는 것이다. 참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쌍계사 들어가는 길은 이 석문으로 가야 제 맛인데 말이다. 뇌파석문을 지나야 청학동을 들어 설 수 있다는 전설이 실감나게 하는 이 돌문을 버리고 옆길로 들어서다니.....
쌍계,석문,장승
바위 양쪽에는 각각 '쌍계', '석문'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다.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로 쓴 글씨라고 한다. 왼쪽바위 앞에는 장승이 서 있었는데 오늘은 피곤한 탓인지 번듯이 누워 있다. 옛 장승은 순천의 선암사, 함양 벽송사의 장승과 더불어 사찰 나무장승 중에서 우수한 것으로 꼽혀 왔다. 옛 장승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나무를 뿌리채 뽑아 거꾸로 세워서 만든 장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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